[하이킥: 짧은 다리의 역습] 계상-지원 커플을 응원하는 이들을 위하여...
에로스와 혁명, 사실 이보다 더 매끄러운 결합은 없다. 둘다 지배적인 코드를 박차고 나가 흐르는 흐름이자 유동성이기 때문이다. 사랑이 삶을 창조할 수 있다면, 그 창조활동 가운데 가장 아름답고 가치 있는 것은 바로 혁명에 대한 열망일 것이다. 혁명에 대한 열망이야말로 국가와 가족, 학벌, 계층의 벽에 갇혀 질식하기 직전인 에로스적 본능을 살아 숨쉬게 하는 최고의 전략이 아닐까.
(고미숙, 사랑과 연애의 달인, 호모 에로스 中에서)

위 글을 인용했음으로 알 수 있다시피, 난 그야말로 '전적으로' 지원과 계상의 관계를 지지한다. 나아가서, 하이킥이라는 이 특이한 시트콤이 시트콤이라는, 단지 웃음을 대목적으로 한채 모든 캐릭터들의 존재나 얽혀 있는 관계들을 단지 수단화(웃기기 위해)하거나 장치화하는 장르적 통속성에 복종하지 않는다는 차원에서, 오로지 이 둘만이 하이킥의 수많은 이성관계 중에서 가장 진정한 사랑을 구현하려는 관계라는 것을 감히 주장한다.

한편, 계상-지원의 관계에 대해서 많은 이들은 불쾌감을 표시한다. 이 불쾌감의 자기 근거는 대략 두세 가지 정도인데, 크게 보면 하나는 시트콤에 어울리지 않는 정극적 요소가 너무 부각된다는 것, 또 하나는 둘 간의 차이(나이 차이, 지위 차이, 가족 관계적(얽혀 있는 친족관계적 차이)차이 등)가 너무 크다는 것, 마지막으로 지원의 일방적 사랑에 불과하다는 것 등이 대략의 이유이다.

나는 이 세 가지 주장을 반박하며 동시에, 지원과 계상의 커플을 지지하는 많은 이들을 지지하려고 한다.

먼저 사람들은 지원과 계상의 관계를 지나치게 정극적인 관계로 판단하며(이 판단은 의심의 여지없이 맞다), 시트콤에 어울리지 않는 관계여서 지루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는 애당초 김병욱 피디의 세계관, 김병욱 피디의 시트콤 제작의 목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몰이해에서 비롯된 주장이 아닐까. 그는 엔딩에 대해서만 '정말로' 수개월 동안 백만개가 넘는 댓글이 달린 하이킥 2의 전설적인(?) 결말에서 사회 현실의 실재(낭만적으로 미화되고 모두가 행복해지는 그런 가짜 현실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를 단 한 장의 스냅사진("우리 이대로 멈췄으면 좋겠어요"라는 장면에서 정말 멈춘 후에 흑백처리되고 끝나는)으로 과감히 처리한 바 있다.

즉, 계급간의 차이는 어떤 사랑으로도 돌파할 수 없으며, 그 사랑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차라리 둘이 죽어야 '멈춰질(이루어질)' 수 있다고. 뿐만 아니라, 빵꾸똥꾸와 신세경의 동생은 막상 서로를 인격적으로 바라보고 존중해 줄 수 있는 성장을 하는 즉시 이민이라는 비극적 결과(한국에서 경제적으로 살아남을 수 없는 신세경 가족의 도피)를 통해 헤어질 수밖에 없음을 애잔하게 그린 바 있다. 결국 인간관계나 사랑등은 현실과 구조 내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는 인식을 과감히 밀고 나간 것이다.

결국 단언컨대, 김병욱 피디에게 있어서 시트콤이라는 장르는 목적이 아니라 수단에 불과하다. 범용하고 통속적인 시트콤들이 모든 현실과 인간관계들을 하나의 장치로 비인격화/수단화하고 웃음을 위한 인간관계로 전도시킬 때, 그는 이러한 상황을 다시 한번 전도시켜서 모든 웃음이든 시트콤이라는 장르든 그것들을 현실을 반영해내는 수단으로 원상복구시킨 것이다. 그는 왜 하필 이런 가장 현실적인 연출을 왜 하필이면 시트콤이라는 장르에서 시도했을까? 드라마에 대해선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시청자들의 태도, 그래서 역설적으로 비현실적인 해피 엔딩을 '진지하게' 바라는 상황을 돌파하기 위해서 정극의 '진지한 미화'를 피해 시트콤의 '우스꽝스럽지만 미화 없는 현실'을 그리기 위해서 불가피한 선택이지 않았을까? 그래서 웃음을 가장 큰 목적으로 바라보았던 시청자들의 기대감을 김병욱 피디가 배반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 기대감이 김병욱 피디의 작품세계를 결정지을 어떤 당위가 될 수는 없다.

둘째, 둘 간의 차이에 대한 불쾌감이다. 나이 차이나는 커플에 대한 이질감, 가족 관계(박하선과 윤지석이 만나는 상황에서)가 더 얽히는 것을 우려하는 혐오감등이 김지원-윤계상 커플에 대한 부정적 감각의 핵심 중 하나이다. 김지원-윤계상에 대해 부정적인 시청자들은 둘의 관계에 대해서 온화한 표현으로는 "이상해 보인다", "어울리지 않는다", 등의 애매하고 모호한 근거를 제시하고, 좀 더 적극적으로는 "원조교제스럽다", "징그럽다"등의 이야기를 하곤 한다. 결국 그들은 차이를 공격하고, 이 차이가 마치 근본적으로 속물적인 욕망(원조교제라든가, 어린 여자애를 특히 성적으로 좋아하는 변태 아저씨)을 가지고 있는 듯이 말하곤 한다. 물론 현실적으로 그런 식의 질 나쁜 관계들은 엄존하지만 적어도 하이킥 내에서의 김지원과 윤계상의 관계는 서로의 결핍을 담지하고 채워주는 순수한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사실 부정적인 시청자들이 정말로 우려하는 건 비슷한 나이대, 비슷한 환경, 비슷한 학벌, 비슷한 지위를 가진 이들간의 연애가 가져오는 안전성과 안정성을 깨트리는 모든 종류의 이질적인 관계들이다. 보수적인 사회로부터 지탄받을 위험을 가지거나, 안정된 행복과 쾌락을 보장할 수 있는 가능성이 눈에 보이게 보장되지 않는 불투명한 관계를 위협과 혐오로 느끼게 되는 것이다. 즉 가능한 사랑만을 안전하게 보장받고, 불가능해 보이는 사랑을 멀리하려는 심리이다. 한편, 우리가 진정한 사랑의 표본을 생각할 때, 그것이 실재했던 인물이든 아니든 몇몇의 대표적인 커플들을 나열하면 원수의 집안이면서 서로 죽음도 불사한 채 사랑했던 줄리엣과 로미오, 연인의 가문에 의해 거세를 당하고도 평생을 편지를 주고 받았던 아벨라르와 엘로이즈, 아버지와 법을 무시한 채 자신의 사랑을 지켰던 안티고네등이 떠오를 것이다. 이처럼, 진정한 사랑에 있어서 위험과 불가능성은 피해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역설적으로 반드시 빠지지 않는 필요조건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삶의 행복감만을 안전하게 공유하는 것이 연애나 파트너쉽이나 합병회사의 차원(안정적인 수익을 서로 주고 받을 수 있을 때만이 서로 엮여 있는)에 머무른다면, 진정한 사랑이란 언제나 법이나 벌이나 장애와 위험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선언하고, 지켜내고, 함께 죽는 것이 아니었나.

결국 시청자들은 안전한 관계, 이질적이지 않은 관계, 사회적으로 지탄받을 위험이 없는 관계에 대한 소망(달달하고 행복한 감각만을 누리려는)을 시트콤 내의 관계로 투사하면서, 역설적으로 진정한 사랑에 대한 열망을 포기하고 안정적으로 달콤한 사탕을 사랑대신 바라고 있는 것이 아닐까.

세계적인 철학자 알랭 바디우는 사랑이란 '진리의 구축'이라고 말했다. 그는 사랑은 하나로 융합되거나 한명이 다른 한명에게 너무나 희생적이거나 합법적 계약에 의한 교환관계같은 관계가 아니라고 한다. 사랑이란 둘이 함께 구축한 세계를 말한다. 둘은 사랑의 주체가 되어 단지 세계가 만들어놓은 룰에 복종하거나 달콤함만을 주고 받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부조리에 대항하며 동시에 둘의 관계를 통해 세계를 새롭게 구축하는 데 있다고 한다.

"최초의 장애물, 최초의 심각한 대립, 최초의 권태와 마주하여 사랑을 포기해버리는 것은 사랑에 대한 커다란 왜곡일 뿐입니다. 진정한 사랑이란 공간과 세계와 시간이 사랑에 부과하는 장애물들을 지속적으로, 간혹은 매몰차게 극복해나가는 그런 사랑일 것입니다." - 알랭 바디우, 사랑 예찬 中에서

마지막으로, 사람들은 둘의 관계가 지원의 일방적 사랑의 과도한 집착이라 불쾌할 뿐이라고 한다. 그러나, 같은 방식의 트라우마를 겪은 이들이 그런 경험을 통해 서로의 깊을 곳을 바라보고 바로 상대방의 그 '빈 깊은 곳'을 채우며 있어줄 때, 서로의 눈물을 바라봐 줄 때, 이 순간 속에 어떤 일방향적인 사랑만이 있을 뿐일까? 나는 오히려,  윤계상과 백진희의 관계야말로 일종의 숭배와 한없는 기다림과 그 기다리는 자기 자신에 대한 나르시시즘적인 슬픔을 겪는 관계에 가깝다고 본다. 또 윤종석의 김지원에 대한 사랑은 순수한 소년이 막 첫사랑을 시작할 때와 같이, 사랑하는 대상의 아픔을 채우려하기보다는 그의 곁에 그저 찾아가고, 기다리고, 곁에 있음을 공유하려는 수준에 머물러 있지 않을까. 반면에 서로의 결핍을 응시하고, 공유하고, 채우는 그런 관계. 서로를 치유하고 함께 상처를 마주하고 극복하는 관계. 이걸 가장 순수한 형태의 사랑이라고 말하지 않으면, 대관절 어떤 진정한 사랑이 있을까.

하이킥3는 인물들간의 로맨스에 과도하게 치중해서 유머와 현실을 동시에 잃어버린, 내 개인적인 평가로는 하이킥 시리즈를 통틀어 가장 흐린 작품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지원과 윤계상간의 관계는 소녀가 아직 제대로 사회에 진입하거나 재편되기 이전에 진정한 사랑을 시도하고 굴복하지 않는 순간을 그리는 가장 빛나는 관계 중의 하나라고 단언한다. 윤계상이 매듭을 짓기 위한 편지를 썼을 때 그 편지를 읽지도 않고 불태워버리며 자신의 마음에 다시 불씨를 지필 때, 혹은 비록 철없는 말이지만 헤어지지 않기 위해 자신의 현실적 위치와 이득(성적)을 포기하고 르완다로 같이 떠나자고 말할 때, 여기엔 이미 사회화되고 복종하고 안전한 연애만을 탐하는 이들이 절대로 가질 수 없는 어떤 진정한 윤리적 태도(사랑에 대한)가 언뜻 언뜻 빛나고 있지 않나. 문학이든, 드라마든, 시트콤이든, 그것들이 어떤 작품적인 의미를 지향한다면, 거기에는 반드시 주제가 무엇이든 영원에 대한 굴복하지 않는 태도가 있어야 한다고 본다. 오로지 그 길만이, 수억만년의 우주 속에서 덧없이 먼지로 사라져버릴 우리에게 결코 그 우주의 시간으로도 지울 수 없는 '영원의 한 순간'을 선사하지 않을까.

'나는 너를 사랑해'가 여러 측면에서 볼 때  '항상'을 의미한다면 '너를 언제고 사랑한다'고 통고하는 것은 사실상 우연을 영원에다 기록하고 고정시키는 것이라고 봐야 합니다. 말에 겁을 먹지 마십시오! 우연의 고정, 그것은 바로 영원의 통고입니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 보면 모든 사랑이 영원을 선언합니다. (중략) 예컨대, 행복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의 행복은 시간이 영원을 맞이할 수 있다는 그 증거인 것입니다." - 알랭 바디우, 사랑 예찬 中에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에게 말했다/ "당신이 필요해요"// 그래서/ 나는 정신을 차리고/ 길을 걷는다/ 빗방울까지도 두려워하면서/ 그것에 맞아 살해되어서는 안되겠기에 - 베르톨트 브레히트, 아침저녁으로 읽기 위하여

집착이라는 천박한 태도에 머물지 않고 그와의 관계 속에서 세계 전체를 바라보는 시좌를 바꾸는 것, 목숨을 무릅쓰고 그를 그 이상의 존재로 만들어주는 것. - 서동진

나는 왜 이웃을 사랑하는가? 그 이웃이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그를 사랑함으로써 비로소 '완전함'을 지향하게 되는 것이 기독교다. 그런 점에서, '사랑'은 어떤 완전한 실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완전함이 결핍되어있는 속에서만 탄생한다. - 지젝

난, 인간은 혁명과 사랑을 위해 태어난 것이라고 확신하고 싶다. - 다자이 오사무

by moonwhale | 2012/03/17 09:34 | 트랙백(1) | 덧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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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at 2012/03/17 21:52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moonwhale at 2012/03/18 00:32
제 빈곤한 글을 과분하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전 님의 "마음이 요동쳤다"는 말이 너무 좋은데, 왜냐하면 이는 제 글이 누군가를 요동치게 할만큼 좋은 글이라는 것이 아니라, 님이 사랑의 영원성(저는 기껏해야 언급했을 따름인)에 대해서 요동칠 수 있는 마음을 가지신 분이라는 것을 뜻하고, 그런 분은 반드시 눈부신 사랑을 할 가능성을 가지고 계신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거든요^^
Commented at 2012/04/19 12:09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moonwhale at 2012/04/19 13:59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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