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학 개론: 영원에서 추억으로, 사랑에서 첫사랑으로

이 글을 읽으시기 전에 주의할 점:

1. 길다. 정말 길다.
2. 거의 모든 내용을 아주 자세한 수준으로 스포일한다. 물론 내 기억의 한계상, 대사나 상황에 대한 묘사에서 틀린 부분이 있을 것이다.
3. 2를 감안하시겠다면, 영화를 보신 분이든, 안 보실 분이든, 보실 분이든 크게 상관없으실 것이다. 그러나 영화를 보실 분은 부디 이 글을 읽지 말아 주셨으면 한다. 웰메이드 한국 영화는 돈을 주고 봐야 하고, 영화 자체의 완성도나 세계관에 동의하지 않으시더라도, 이 영화가 불러오는 우리 자신의 첫사랑의 기억으로의 여행은 얼마든지 가볼 만 하다. 그리고, 이 글을 읽고 나시면 그 여행에 가시기 어렵다 ㅡㅡ; 한편 이 영화는 혼자 가셔서 보는 게 아주 좋다.







건축학 개론: 영원에서 추억으로, 사랑에서 첫사랑으로






건축학 개론은, 한 사랑의 시작과 끝을 건축의 시작과 끝을 통해 연결지어 보여주는 영화다. 영화는 수시로 교차 편집(과거와 현재를 왔다갔다)하면서, 건축 혹은 사랑의 의미를 나름의 시선으로 보여준다. 그래서 이 영화는 건축(혹은 집)에 대한 영화면서, 동시에 사랑에 대한 영화다. 영화 시작부터 끝까지 지속되는 교차편집의 복잡성을 차치한다면, 영화의 줄거리는 간단한 편이다. 뒷 문단에서 길게 늘어뜨리기 전에 건조하게 추스르면 이렇다. 건축가인 승민에게, 어느 날 친구라는 사람이 찾아온다. 처음엔 잘 알아보지도 못했던 그녀의 이름은 서연.(이하 표현의 경제성을 위해서 때에 따라 '현대의 서연'은 '한가인'으로, '과거의 서연'은 '수지'로 표현하겠다. 마찬가지로, '현재의 승민'은 '엄태웅', '과거의 승민'은 '이제훈'으로.) 서연은 십오 년 전, 스무 살 때, 그러니까 대학교 일 학년 때의 승민의 첫사랑이다. 엄태웅과 한가인과 엄태웅의 결혼할 여자친구가 가진 술자리에서, 현재의 여자친구(고준희)의 표현에 의하면, 그녀는 승민에게 '썅년'이란 이름으로 남아 있다. 즉 무언가의 갈등이 그곳에 있었던 것이다. 서연은 제주도의 빈집에 대한 건축 시공을 승민에게 맡기고, 승민은 그 제안을 받아들여 건축 시공에 들어간다. 이건 승민에게도 '첫' 시공이다. (그전까지 자신은 '시다'에 불과했다고 한다.) 그러나 승민이 제시한 이런저런 최신의 디자인들이 서연에겐 별로 맘에 들지 않고, 이때 승민과 같이 일하는 여자친구(고준희)가 증축을 건의한다. 증축이란 신축이나 reset과는 달리, 기존의 집에 새로운 건축물을 부가(증축renovation)하는 방식이다. 시공이 진행되어 가면서 둘의 과거와 현재가 무수히 교차로 펼쳐진다. 과거에선 둘의 만남과  끝, 풋풋했던 사랑의 시작이 오해(?)로 인해 좌초하는 과정이 담겨 있고, 현재에선 15년 전의 첫사랑의 실패 이후에도 없어지지 않은 감정의 잔여가 둘 사이에 언뜻언뜻 긴장감을 부여하며 돌출된다. 완공단계에 이르러서, 서연은 준공을 이주 앞둔 날 갑자기 설계 변경을 부탁한다. 피아노를 놓을 수 있는 장소의 마련하기 위해, 그리고 아버지와 함께 완전히 내려가서 살기 위해. 준공 직전의 설계 변경은 더 많은 시간의 연장을 필요로 하는 일이고, 여자친구도 화를 내지만, 엄태웅은 그 설계 변경에 동의를 해주고, 결혼과 해외로의 이주를 미루면서까지 작업을 마무리한다. 완공이 마침내 되고 난 이후, 엄태웅은 결혼하고 해외로 떠나고, 서연은 제주도에 내려와 아버지와 함께 만들어진 집에서 피아노를 가르치며 살게 된다.

어떤 분은 이 영화가 리얼리티가 형편없고 허술한 영화라고 하는데, 그 분이 지적하신 부분을 아주 재밌게 읽었다. 예컨대 옥상에서 둘이 처음 전람회를 듣는 동안에 씨디 플레이어에 소리가 미니멈으로 표시되어 있다거나, 서연이 강남에 사는 설정으로 해놓고 집 앞에 송파점이라는 가게가 있다거나. 하지만 내가 볼때 이 영화는 영화의 내적 구성과 장치의 정교함으로 따지면 나름대로 정교한 영화라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96년도 당시를 현실감 있게 재현하지는 못했을지라도, 영화를 전개해나가는 과정에서의 중점적인 대사들이나 사물의 배치는 정교했다. 이 영화에는 교차 편집 속에서 무수히 많은 이항 대립쌍들(상황이든, 사물이든, 대사든)이 등장하는데, 이들이 개별적으로든 대립적으로든 전부 철저히 계산된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줄거리를 길게 늘어뜨려 세세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건축학 개론의 시작과 끝



영화는 한가인(서연)이 제주도의 어떤 낡은 집을 둘러보면서 시작된다. 곧이어 장면이 전환되고, 엄태웅(승민)이 등장한다. 엄태웅은 거의 반쯤 날라간 도면을 상사에게 보여주는데, 상사가 너무 날린 것이 아니냐고 묻자 엄태웅은 이렇게 대답한다. "좀 날려줘야 이쁘다고들 여기잖아?" (이런 최신의 디자인 개념은, 곧 이어 등장할 건축주의 정체성과 추억을 담은 디자인과 대립적인 개념이고, 이 후자의 개념이야말로 감독이 가지는 건축에 대한 핵심 개념이다. "집을 짓는 이유를 알아야, 널 알아야 네게 맞는 집을 건축해주지." 이 의미는 이후로 영화 전체를 관통하고, 시작부터 그 끝을 완결지을 것이다.)

서연의 집을 승민이 지어주기로 결정한 이후, 시대가 전환된다. 건축학 개론 수업이 시작하고, 수지가 처음으로 등장한다. 뒤늦게 들어오는 수지는 승민의 눈에 '번쩍' 띈다. 교수는 학생들에게 자신이 사는 곳과 학교 두 장소를 스티커와 펜으로 잇게 하는데, 이제훈이 학교에서부터 집으로 긋는 동선은 서연의 동선과 일치하고, 이제훈의 펜이 멈춘 곳에 서연이 멈춰진 곳이 있다. 이제 이 우연에 의해 만남이 시작된다.

버스를 따라 집을 따라 겹쳐진 동선을 따라 승민은 서연의 뒤를 걷다 동네에서 친구와 만난다. "아는 애냐?" "아니, 모르는 앤데?" 자기가 사는 곳과 그 주변부를 이해하고 오라는 숙제를 하기 위해서 승민은 공원에서 사진을 찍다 서연과 마주친다. 모르는 척하는 승민에게 서연이 묻는다. "저 알죠?" 둘은 빈 집을 찾아낸다. 승민은 들어가기를 머뭇거리고, 서연은 거침없이 들어간다. "여긴 '남의 집'이잖아 서연아." "아니? '빈 집'이지." 그리고 거리 개념을 이해하라는 교수의 또 다른 리포트. 둘은 거리를 알기 위해 함께 여행을 다니고, 어떤 옥상에서 노래를 같이 듣는다. 바로 전람회의 기억의 습작. 서연은 승민에게 전람회의 앨범과 씨디플레이어를 건네준다.

다시 시대가 전환된다. 한가인은 여전히 엄태웅이 제시하는 최신의 디자인들이 맘에 들지 않는다. 이때 고준희가 그럼 증축renovation을 시도해보자고 건의한다. 증축하기로 결정한 후에, 한가인은 넥타이를 사서 엄태웅을 기다리지만, 고준희가 엄태웅을 따라왔다. 한가인은 몰래 넥타이를 숨긴다. 셋이서 이야기를 하다가, 한가인은 엄태웅이 곧 고준희와 결혼할 사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장면이 전환된다. 이제훈은 강남에 사는 잘 나가는 선배 재욱의 방에 와 있다. 그는 평생을 써도 다 못 쓸 것 같은1기가 짜리 컴퓨터를 가지고 있다. 수지와 제훈은 빈 집을 꾸미고 있다. 화분에는 아직 자라지 않은 씨앗을 심는데, 수지는 제훈에게 이게 무슨 꽃인지 알려주지 않는다. 기다리는 설레임을 위해서. 승민은 화분을 심다가 서연이 음대생이면서도 건축학 개론을 듣는 이유가 승민의 잘 나가는 선배 재욱 때문임을 알게 된다.

다시 한가인과 엄태웅. 학교 앞에서 한가인은 엄태웅에게 우리 첫눈 오는 날 빈집에서 만나기로 하지 않았었느냐고 묻고, 엄태웅은 우리가 언제 그런 약속을 했느냐며 반문한다. 둘은 술자리를 갖는데, 한가인은 매운탕을 시켜놓고 이렇게 말한다. "알탕은 알이 들어서 알탕인데, 매운탕은 왜 그냥 이것저것 다 쑤셔박아놓고 매운탕이라 그러는 거야? 맘에 안 들어. 그냥 맵기만 하고 이름은 없는 거. 내가 딱 매운탕 같아." 이제 일어나자는 엄태웅에게 한가인은 술을 더 마시겠다고 고집을 부리다가 테이블 옆으로 쓰러진다. 손에서 피가 나자 엄태웅은 한가인의 손을 잡아주며 빨간 약을 바르면 금방 낫는다고 말하지만, 한가인은 갑자기 소리친다. "병신, 개새끼, 시발 좃같아!" 소리 지르며 울고 엄태웅의 가슴을 두들기던 서연을 엄태웅이 안아준다.



다시 과거로 간다. 교수가 내어 준 리포트 주제는 '그 곳에 살고 싶다!'. 둘은 철길에 가고, 이날은 수지의 생일날이다. "너 생일이면 친구들하고 파티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야?" "넌 내 친구 아니니?" 어느 벤치에 앉아 서연이 말한다. "내 별명이 뭔지 알아? 피아노 학원이야. 학원 다녀서 대학 들어왔다고. 이제 피아노는 지긋지긋해." "그럼 뭐 할 건데?" "난 아나운서 할 거야. 아나운서 하면 돈 많은 남자랑 결혼할 수 있거든." 서연이 장난 식으로 그린 이층집의 설계도를 바라보면서, 서연의 얼굴에서 승민은 빛과 사랑을 본다. 서연과 승민은 어둑해진 버스 정류장에서 정릉으로 돌아가기 위해 버스를 기다리고, 피곤한 서연은 승민의 어깨에 얼굴을 기댄 채로 잠이 든다. 승민은 한쪽 다리를 덜덜 떨며 서연의 입술을 내내 바라보다가, 서연에게 살짝 입맞춤을 한다. 얼이 빠져 있는 승민의 옆에서, 서연이 잠에서 깬다. 승민은 서연을 보며 자신의 도둑질을 서연이 알아차렸을까 당황하지만, 서연은 승민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오줌이 마렵단 말로 모른 척을 한다. 서연의 모른 척은 재욱의 차를 탄 상황에서 다시 한번 반복된다. 뒷칸에서 자고 있는 승민을 보며 서연에게 "둘이 잘 해보라"는 재욱의 말에 서연은 우린 그런 사이가 아니라고 부인하면서. 서연은 재욱을 보기 위해 건축학 개론 수업을 들으면서 승민과 같이 빈집에서 화분을 심고, 승민이 자신의 입술에 키스를 한 사실을 알고 승민에게 마음이 끌리면서도 재욱의 말을 부인한다. 재욱이 승민의 티셔츠에 새겨진 geuss가 guess의 짝퉁 철자란 사실을 지적하고 서연과 같이 낄낄대자, 승민은 벌떡 일어나서 차에서 내린다. 승민은 집에서 대문이 찌그러지도록 걷어찬다. 승민은 재욱의 개입을 위협으로 느껴서, 서연에게 고백을 하려고 한다. 첫 눈 오는 날 만나자고 하면, 그게 곧 고백의 메타포가 될 테니까. 서연은 정릉에서 다시 강남으로 이사를 가고(비록 반지하더라도), 다만 첫 집들이로 승민을 선택한다. 둘은 첫 눈 오는 날에 보기로 한다. 승민은 집에 돌아와 춤을 춘다.

다시 시대가 교차한다. 엄태웅은 한가인에게 미역국을 사준다. 오늘이 서연의 생일임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 서연은 생일선물로 다시 한번 설계변경을 요구한다. "정리하고 내려와서 살려고. 우리 아빠도 몸이 너무 안 좋고, 나도 고향에서 새출발하고 다 reset하려고" (감독은 여기서 제주도 집으로 내려가는 한가인과, 강남으로 올라가던 수지를 대치시키려 하는 것 같지만, 내가 볼 때 둘은 어떤 신화적 희망을 물신하는 이름만 다른 동일자다.) 준공을 2주 앞두고 설계를 변경한다는 말에 고준희(승민의 여자친구)는 화를 내고 상사는 자기가 마무리를 맡겠다고 하지만, 승민은 고집을 부려 자기가 마저 완공하겠다고 말한다. "내가 할게, 내가 끝낼게." 피아노는 거실에 놓기로 하고, 대신 한가인의 방은 이층에 올리기로 한다. 한가인은 공사의 와중에 바다가 보이는 전경을 감상하다가, 이층의 정원에 누워 잠들은 엄탱웅의 옆에 다가가 눕는다. 그리고 잠든 엄태웅의 입술을 몰래 만진다. 그녀는 잠들었을 때 승민이 그녀에게 했던 행동을 반복하는 것이다. 물론 입술이 아니라 손가락으로.



다시 장면 전환. 건축학 개론의 종강 뒷풀이에서, 수지는 계속해서 제훈을 찾고, 승민은 언젠가 서연이 그렸던 이층집 설계도를 토대로 도형도를 만들고 고백을 준비하면서 서연을 계속 기다린다. 서연은 삐삐를 치지만 승민은 답이 없고, 재욱 선배는 서연을 취하게 만든다. 승민은 서연의 집 앞에서 기다리던 도중 취한 서연을 부축하는 선배를 발견하고, 선배가 서연과 함께 집에 들어간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아 정릉으로 되돌아가려 한다. 정릉은 강 건너라 갈 수가 없다는 택시기사의 말을 무시하고, 택시문을 부여잡고 승민은 소리를 지른다. "정릉 가 시발!" 잊으라는 친구의 말에, 아무 일 없는 듯 친구의 여자친구들과 함께 첫 눈 오는 날 2대2 데이트를 하면서 (서연과 했던) 손목 때리기도 하자는 위로에, 승민은 서러운 울음을 터트린다. 다음날, 서연은 집 앞의 쓰레기 더미에서 버려진 도형도를 발견한다.

다시 장면이 전환한다. 엄태웅은 한가인의 집을 둘러본다. 이윽고 밤이 돼서, 둘은 화분을 심는다. (물론 이 화분은 '다 자란' 화분이며, 언젠가 서연이 대학 내에서 방송을 하며 설레임을 이유로 씨앗의 이름을 알려주지 않았던 사연을 얘기하던 날과 대립한다.) 이제 건축은 다 끝났다. 서연은 승민에게 소감을 묻고, 승민은 쉽게 대답하지 못한다. "글쎄...." 왜 옛 약속을 지켜주었냐고, 날 좋아했었냐고 서연이 승민에게 묻자 승민이 대답한다. "좋아했었으니까.." "참 오래도 걸렸다." "내가 너 좋아한 거 알았어?" "내가 바보니? 당연히 알았지. 너 나 잘 때 키스도 했잖아." 잠시의 정적 후 승민은 너무 늦었다며 이만 가보겠다고 한다. 가려던 참에 현관에 쌓인 박스들을 보고 집 안으로 들어주겠다고 하다가, 자신이 버렸던 건축 도형이 박스에 넣어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 얼굴이 굳어진다. "도대체 왜 날 찾아왔니?" "궁금해서..." "그게 다야? 궁금해서? 이건 도대체 왜 갖고 있던 거야?" "왜? 갖고 있으면 안 되니? 니가, 내 첫사랑이었으니까..." 서연은 눈물을 흘리고, 이제야 서연에게도 자신이 첫사랑이었음을 안 승민이 서연에게 키스를 한다.

다시 과거. 수지는 건축과로 제훈을 만나러 왔지만, 제훈은 수지에게 전람회 씨디와 씨디 플레이어를 돌려주며 말한다. "이제 그만 나한테서 꺼져줄래?"

엄태웅은 상념에 빠져 있고, 고준희는 웨딩드레스를 고르는 데 정신이 없다. 한가인은 병원에서 병들고 죽어가는 아버지와 있는데, 아버지는 답답하다며 집에 가고 싶다고 말한다. 와중에 한가인은 자신의 집 내부를 찍은 사진들을 보여주는데, 거기서 엄태웅이 나온다. 아버지는 누구냐고 묻고, 한가인은 눈물을 삼키면서, "그냥....친구"라고 대답한다. 그렇다. 사랑은 지나간 첫사랑이 되고, 연인은 친구가 된 것이다. 한편 엄태웅은 오래된 어머니의 집에 찾아갔다. 엄마는 곧 해외로 떠날 아들을 위해서 순대국을 먹이고, 엄태웅은 "나 그냥 미국가지 말아버릴까?"라고 말하다가 '비싼' 밥 먹으면서 웬 헛소리냐는 핀잔을 듣는다. 엄마는 재개발 뒤에도 그냥 여기 머물러서 살겠다고 말하고, 왜 아파트로 좋은 데로 가지 않느냐는 엄태웅의 성질에 이렇게 답한다. "지겹지도 않아요 엄마?" "집은 그냥 집이지 지겨운 게 어딨어." 엄태웅은 집 밖으로 나와 대문 앞에 걸터앉는다. 어린 시절 guess짝퉁 옷을 입었단 소릴 듣고 홧김에 걷어찼던 대문은 여전히 찌그러져 있고, 엄태웅은 대문을 고치려 이리저리 힘을 써 보지만 대문은 결코 고쳐지지 않는다. 엄태웅은 흐느낀다.

다시 장면은 과거로 전환된다. 마침내 첫 눈이 오는 날, 수지는 화장을 이쁘게 하고, 씨디 플레이어와 전람회를 들고 빈 집에 찾아간다. 기다려보지만 승민은 오지 않고, 서연은 집을 쳐다보다가 훌쩍인다. 이때 수지는 얼굴 정면이 아니라 백샷으로 보여지는데, 다만 훌쩍이는 소리가 들릴 뿐이다.

다시 현재. 고준희와 함께 비행기를 타고 가는 엄태웅은, 이런저런 상념에 빠져 있지만 어깨에 기대는 고준희에게 옷을 덮어주고 어깨를 내어 준다. 제주도에서 아이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치던 한가인에게 어느날 택배가 온다. 열어보니 들어있는 것은 씨디 플레이어와 전람회. 그렇다. 승민도 그 곳에 왔던 것이다. 한가인은 쓸쓸한 미소를 지으며 저 멀리 바다를 바라본다. 바다를 비추며 영화가 막을 내린다.







건축의 개념

영화는 건축의 개념을 때로는 개론 수업을 진행하는 교수의 목소리를 통해서, 때로는 한가인(건축주)과 엄태웅(건축가)의 갈등을 통해서, 때로는 한가인과 엄태웅 개인의 말과 태도에서, 때로는 한가인의 아버지의 목소리와 엄태웅의 어머니의 목소리에서 찾는다. 교수는 말한다. 건축학 개론이란 첫째, "자기가 사는 곳, 주변부를 관찰하고 이해하는 것"이라고. 마찬가지로 사는 곳이 같다(정릉)는 우연을 통해서 수지와 제훈은 둘의 물리적 주변부와 서로의 정신이라는 주변부를 관찰하고 이해해나가기 시작한다. 둘째, 교수의 말에 따르면 건축학 개론이란 자신이 사는 곳 주변의 '거리'들을 이해하는 것이다. "거리를 이해한다는 건 물질적 거리와 정신적 거리(...)" 그러나 이 거리를 이해하는 방식은 영화를 통해 상반되는 두 갈래로 갈라지는 데, 전자가 수지와 제훈이 그 거리를 '같이 걸으며' 거리가 있는 장소로 '가고' 그 거리의 선을 자신의 발로 '채우는' 것이라면, 후자의 방식으로 거리를 이해하는 길은 정확히 말하면 이해를 포기하는 것, 다시 말해 멀리 떨어진 미지의 x를 거리란 이름으로 칭하면서 그 거리가 무엇인지를 겪거나 가지 않는 대신  그 거리라는 미지의 x로부터 '멀어지고' '떨어지는' 것이다. 아이러니한 사실은, 겪지 않으면 거리를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알기 위한 거리'는 곧 '멀어지기 위한 거리' 내지 '망각하기 위한 거리'로 바뀐다. 문제는 이런 후자의 거리의 개념이 영화 내에서 건축의 개념으로 포섭된다는 것이다. 거리는 그래서 가보는 길이 아니라, 가지 않는 길이 된다. 셋째, 교수의 말에 따르면 건축학 개론이란 또한 "그곳에 살고 싶다!"라는 이상향을 아는 것이다. 수지와 제훈은 이런 레포트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철길'로 오는데, 이 철길은 마치 '매끄러운 공간'(들뢰즈)처럼 특정한 좌표가 없이 그 어디로든 갈 수 있는 뚫리고 열려 있는 무한한 가능성의 공간이다. (물론 노선이 '고정'되어 있기도 하지만) 한편 현재의 한가인은 '제주도'로 내려가는 데, 이 곳은 삶을 새롭게 시작하는 곳이면서도 동시에 그 곳에서 삶을 마무리하려는, 한가인의 죽어가는 아버지와 함께 자신의 사랑을 묻는 곳이다. 때문에 이 공간은 '홈 패인 공간'(들뢰즈), 다시 말해 고정되고 정착된 채 벗어날 수 없게 만드는 공간이다. 넷째, 임태웅에 의해서 말해지는 건축이란 건축주를 담는 공간이다. "집 짓는 이유를 알아야, 널 알아야 집을 짓지 " 이는 영화 내에서 '날라가는'(그래서 있어 보이는) 최신의 디자인들과 대비되는데, 이 대비되는 디자인이 증축이란 공사 방식을 통해 포함시키는 것은 한 개인의 삶의 추억들이다. 다시 말해 건축이란 그의 삶을 집어 넣는 것(저장)이나, 그의 삶을 건축(창조)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건축이란 '완공'이다. 이는 끊임없이 공사의 도중에 디자인을 거부하고 증축이나 설계 변경과 공사 기간의 연장을 요구하는 한가인의 태도와 미묘하게 갈등을 만들어낸다. 물론 설계 변경과 증축은 결과적으로 완공을 막을 수는 없고 다만 더욱 완벽한 공사가 되도록 '보충할' 뿐이다. 설계 변경의 요구를 들어주려는 엄태웅에게 고준희는 결혼이 늦어진다며 화를 내는데, 엄태웅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끝낼게. 그럴 수 있게 해줘" 다섯째는 엄태웅과 한가인의 부모들의 목소리다. 한가인의 아버지는 병들고 죽어가는데, 일년 남짓 남았으리라 예상되는 자신의 마지막을 자신의 삶이 깃든 곳, 제주도에서 보내고 싶어한다. "집에 가고 싶어.." 한편 엄태웅의 어머니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집은 그냥 집이지 지겨운 게 어딨어." 한가인의 아버지는 제주도로 돌아가고, 엄태웅의 어머니는 살던 곳에서 마저 살다 죽으려 한다. 영화는 최신의 디자인과 대비되는, 그의 삶을 집어 넣는 디자인(증축)을 대비시키고, 부르주아적 열망을 위해 서울로(그리고 정릉에서 강남으로) 올라가려던 수지나 아버지의 욕망과 제주도로 내려가 살려는 한가인의 욕망을 배치시키지만, 또한 제주도에 남는 한가인과 해외로 떠나는 엄태웅을 그 정신적이고 물리적인 거리감으로 대치시키지만, 사실은 이와 다르다. 둘은 이름만 다른 동일자다. 왕가위의 영화 <동사서독>에 대한 이진경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이진경, 철학의 외부, p.277-278) 이진경의 말에 의하면, 영화에서 주인공 구양봉은 사막을 방랑하며 살아가는데, 그는 실패한 사랑의 기억에 사로잡힌채 '멈춰져' 있고, 사막 가운데 살면서 사막 자체도 제대로 돌아본 적이 없으며, 산 너머에 무엇이 있을까 하는 궁금도 잃어버렸다. 결국 방랑이나 이주(엄태웅 혹은 구양봉)의 공간조차 정착의 공간, 멈춤의 공간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영화는 보여준다. 이진경은 떠돌아다니는 자들도 "멈추어 있는 자들일 수 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삶을 생성할 수 있는 능력이다. 물론 이진경의 말을 내 식대로 비틀자면, 이는 현재와 미래라는 새로움 자체에 취한 채 다만 현실에 순응하는 식의 위험을 피하면서, 과거를 끊고 마냥 현재와 미래로 달려나가지 않으면서도 멈춤 속에서도 무언가를 생성하는 능력(멈춤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생성을 위한 멈춤이며 생성을 위한 이동이 중요하다)이다. "이주민과 유목민은 다르다!"(들뢰즈) 따라서 영화가 대립시킨, 남은 한가인과 떠난 엄태웅, 내려간 한가인의 아버지와 남은 엄태웅의 어머니는, 이름만 다른 동일자이다. 둘은 어떤 신화적 희망(추억이 어린 제주도로의 정착이 불러올 희망, 서울이나 강남 같은 부르주아적 상징의 장소가 가져올 희망)을 공유하는 동일자다. 둘이 서로 간에 가지는 개별적인 차이는 여기서 전혀 중요하지 않은데, 중요한 것은 이 다른 이름을 지닌 두 희망들이 결국은 서연과 승민에게 있어서 사랑의 대체물이기 때문이다. 추억을 증축이란 이름으로 저장하고 그곳에서 추억들과 함께, 지긋지긋한 피아노와 함께 박제되는 한가인의 멈춤은, 어떤 신축도 증축도 아니면서 동시에 해외로 이주하면서 '이미 있는' 집으로 들어가게 되는 엄태웅의 이주하는 멈춤과 그래서 같다.

사랑과 동일시되는 이 건축의 과정엔 중요한 의미가 있는데, 그것은 건축이란 '정적인' 것이며, 끝없이 설계가 변경되고 지속되는 것이라기보단 설계가 완성되는 것이며, 연장되는 것이라기보단 완공되는 것이며, 열려있다기보단 닫혀 있는 것이며(물질적 구조적으론 바닷가의 전경이 훤히 보이는 뚫린 구조이지만), 건축을 위해 건축주의 삶을 반영(저장)은 하되 건축주의 삶을 건축(창조)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 그리고 영화는 교차편집을 통해 끊임없이 대립쌍(현재-과거, 설계-설계변경, 남는 어머니-떠나는 엄태웅, 정릉-강남, 전람회 앨범의 빌려줌-되돌려줌, 모르는 체-아는 체, 찾아오기-떠나기, 잊기-기억하기, 대립적인 의미를 지닌 과거와 현재의 두 키스)들이 등장하고, 영원하고 싶었던 순간이 추억이 되기까지, 지금의 사랑이 과거의 첫사랑이 되기까지를 준공한다. 감독은 이 영화를 자신의 삶에 대한 자전적 영화까지는 아니어도, 자신의 사랑에 대한 반성적 의미에서 만들었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감독에게 있어 건축이란 자기 삶의 중요한 순간들을 포함한 디자인이며(날라가는 최신의 디자인과 대비되는), 동시에 내 삶의 중요한 순간들 속으로 나를 집어넣는(또는 다시 제대로 훑어보는) 과정이다. 따라서 집이란, 단지 물질적으로만 정적인 것이 아니라, 추억이라는, 현재와 이어지지 않는 어떤 단절된 과거의 기억의 의미로의 멈춤이며, 삶의 태도에 있어서도 엄태웅 어머니의 말처럼 그냥 사는 것, 혹은 엄태웅처럼 그냥 떠나는 것으로서의 정적인 것을 의미한다. 알고 돌아보되, 끝내고 닫고 떠나는 것. 바로 이것이 완공이다.

첫사랑의 의미

엄태웅이 떠나고 한가인이 남음으로써 이제 사랑은 '영원한 것'이 아니라 '영원히-깨질-수-있는-것'이 되었다. 그들은(우리는) 사랑의 능력에 커다란 금이 하나 간 채로 살게 되었다. 그 금 속에는 영원히 찬 바람이 샌다. 우리는 누구나 미숙한 주체로 삶(과 사랑)을 시작하며, 미숙한 주체는 그 누구라도, 첫사랑에 실패한다. 이는 거의 필연적인 일이다. 또한 그 실패를 되돌림으로 사랑을 재완성시키는 일을 버텨내는 이들도 몹시 드물다. 우리는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노련해져서, 사랑에 실패하지 않는 법, 실패를 피하는 법을 배우지만, 사실 이것만으론 언제나 부족하다. 우리는 끝끝내 사랑을 되돌리는 일, 다시 말해 실패를 단지 피하는 것이 아니라 실패를 맞이했을 때 그 실패를 되돌리는(극복하는) 일을 해내지 못했음으로.

첫사랑의 진부한 의미가 그 '처음의 사랑'에 방점을 찍는다면, 그래서 두번째 사랑과 세번째 사랑보다 우월하다는 식의 최초에 대한 환상을 품는다는 점에서 비판받아야 한다면, 그에 비해 첫사랑의 진정한 의미는 단연코 '처음의 실패'에 있다. 우리는 실패를 받아들이거나, 실패를 받아들이지 않음(실패를 사랑으로 되돌림)의 오로지 두 갈랫길에서 하나의 선택을 하게 된다. 우리는 실패를 받아들이는 삶(사랑을 성장통이란 식의 이름으로, 목적이 아니라 수단으로써 변환 가능하게 바꿔내고, 삶과의 불가분성이 아니라 삶과 분리된 것으로 겪어내게 된다)과 실패를 복구하는 삶으로 나뉘고, 전자는 결코 영원을 담보하지 못한다. 사랑이란 언제나 활활 타오르는 속에서 있는 것이 아니라 꺼진 촛불을 다시 키우는 데 있음으로. 타고 있는 불빛은 세계의 엔트로피 법칙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마치 사랑과 관련한 호르몬이 3년의 한계수명을 가지고 있듯이. 결국 사랑의 영원성이란 타고 있는 불빛이 아니라 매순간의 꺼짐 속에서 새롭게 태어나는 불빛속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전자가 단지 가능성의 사랑이며, 세계라는 법칙적 필연성에 종속된 사랑이라면, 후자는 불가능성을 견뎌내는 사랑이며, 법에 종속되지 않는 사랑이다.

그래서 첫사랑이란, 그 최초의 실패로부터 우리가 앞으로 사랑의 영원성을 버텨낼 것인지 아니면 가능성의 법칙에 따라 포기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들 것인지의 '두 영원성' 중 하나만을 선택하게 한다. 이것은 단순히 최초의 선택이 아니라, 최초의 선택이면서 동시에 우리 삶의 끝의 선택이기도 하다.(밀란 쿤데라는 이렇게 말했다. "첫번째 배신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다. 첫번째 배신은 그 연쇄작용으로 인해 또다른 배신들을 야기하며, 그 하나하나의 배신은 최초의 배신으로부터 우리를 점점 먼 곳으로 이끌게 마련이다." ) 우리가 누군가를 정말로 사랑하게 될 때, 그 사랑에 대한 책임은 결코 기억이나 보존이나 공사의 마무리나 작별의 키스에 있지 않다. 한가인이 엄태웅에게 엄태웅이 자신의 첫사랑이었음을 고백한 후에 둘이 했던 입맞춤은 작별의 키스이자 사후死後의 키스이며, 둘의 이별을 완성짓는 정점이었다. 반면 과제를 위해 둘이 떠났던 여행속에서 둘은 거리를 같이 걷고 겪어냈으며,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를 기다리던 정류장에서의 이제훈의 키스는 수지를 '깨우는' 키스였으며, 이제훈의 고백의 감정과 수지를 위한 건축모형도의 '창조'를 이끌어내는 사후事後(에 무언가 있게 만드는)의 키스였다. 사랑을 시작하는 키스와, 사랑을 끝내는 키스, "우리 알지 않아요?"라고 공원에서 만난 이제훈에게 먼저 아는 척을 하는 수지와, 수지 뒤를 따라서 집으로 가다가 만난 친구의 물음에 "아니 모르는 앤데?"라고 모르는 척을 하는 이제훈, 앞날의 설레임과 가능성을 위해 무슨 꽃인지를 이제훈에게 알려주지 않고 같이 '씨앗'을 심은 수지와, '다 자란' 화분을 엄태웅과 같이 심는 한가인, 사랑을 고백하기 위해 집을 지었던 승민과, 사랑을 끝내기 위해 집을 지었던 엄태웅. "내가 끝낼게. 내가 하게 해줘" '빈 집'을 꾸미면서 사랑을 싹틔우던 수지와 이제훈의 빈 집의 추억을 박제(증축)해놓고 자신마저 가둬두는 한가인의 '집', 지긋지긋하던 피아노를 피하려 했지만 이내 그 새로운 삶의 욕망이 곧 아나운서(돈 많은 남자와 결혼할 수 있게 해주는)라는 열망으로 왜곡되던 수지, 제주도를 피해서 정릉으로 왔고 그 곳에서 승민을 만나 빈 집도 같이 꾸미지만, 다시 비록 반지하더라도 강남으로 이사하는 수지의 열망, 수지가 영화의 시작부에 좋아하던, 덕분에 음대생이면서도 건축학 개론을 듣게 했던 강남의 잘 사는 선배에 대한 선망과 이제훈과의 풋풋한 첫사랑 사이에서의 배회, 의사와 결혼에 성공했으나 또 이혼하는 한가인의 배회. 승민이 모르는 척하고, 오해하고, 떠나고, 잊고 되돌려주는 남자였다면 서연은 아는 척 하고, 찾아오고, 기억하고, 건네주는 여자였으나 결국은 승민과 재욱 사이, 정릉과 강남 사이, 결혼과 이혼 사이를 배회하다 멈추었다. 매운탕처럼. 택배로 다시 한번 엄태웅에게서부터 씨디플레이어를 돌려받은 한가인은 미소를 짓고 영화는 끝이 나지만, 택배로 되돌려받은 전람회 앨범과 씨디플레이어로부터 우리는 엄태웅이 한가인이 첫사랑이었음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음을, 그도 첫 눈 오는 날 거기 왔었음을 알게 되지만, 이것은 사후死後의 키스처럼, 사랑'했었음'이란 사실을 전달하면서 덕분에 사랑의 지금-없음을 완공한다. 따라서 우리는 그 미소 속에 든 것이 추억의 빈껍데기 외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안다. 영화의 엔딩은 택배를 받고 미소를 짓는 한가인이 바다를 쳐다보면서, 동시에 집 밖에선 죽어가는 아버지가 시멘트가 채 평평하게 굳기 전에 어린 한가인의 발자국이 실수로 찍힌 곳을 쳐다보는 데서 끝난다. 나는 여기서 이 영화의 감독이 자신의 지금까지의 흐름을 뒤집으려 하는 것이 아닐까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는데, 왜냐하면 이 장면은 배경음악으로 흘러나오는 따뜻한 음악과 맑은 날씨와 넓은 바다에 매몰된 채 서연과 서연의 아버지가 화석이 돼가는 풍경을 조금의 가감도 없이 역설적인 직접성으로 그로테스크하게 내비추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우리에게 첫사랑이 있었다는 사실(존재함)보다, 우리에게 첫사랑의 아픔이 있었다는 사실(부재함)을 비추고, 이 아픔은 롤러코스터의 고통스런 희열처럼 우리에게 먹먹한 정적의 희열을 준다. 이 희열은, 우리의 과거와 현재를 단절시킨 장소를 복구해야 하는 데서 오는 '책임'을 무마시켜주는 '죄책감' 즉 해방의 도구이며, 견딜 수 없는 고통이 아니라 견딜 수 있는 카타르시스(감정의 정화)이다. 영화는 없음을 통해 있'었'음을 보여주며, 동시에 있'었'음을 통해 지금-없음으로 순환하는 하나의 원형적인 과정을 통해 자기-완결되는 기나긴 여정을 끝낸다.

 승민과 서연은 이러한 차이들이 결국은 현실의 고정된 영원성을 만들어냈음을 깨닫고, 모든 것을 뒤집어야 한다. "모르는 앤데?"라는 대답을 "아는 애야"라는 대답으로, 작별의 쓸쓸한 키스가 아니라 잠든 사랑을 깨우는 설레임의 키스를. 그래서 추억에서 영원으로, (이미 끝났음을 내포하는) 첫사랑에서 (끝없음의) 사랑으로. "첫사랑이었으니까.."

영화가 끝난 후에도

나는 영화를 보며 몇 가지 인상적인 장면을 영화 밖에서 목격했다. 영화가 끝난 후에 나는 핸드폰을 떨어트려 한참을 핸드폰을 찾았는데, 얼마 있지 않던 관객들이 전부 빠진 후에도 내 앞줄의 한 여자가 영화의 엔딩 장면을 바라보며 영화가 멈춘 곳에서 같이 멈춰 있었다. 한편 영화의 중간에서는, 마침내 첫 눈이 오던 날 씨디플레이어와 전람회를 다시 들고 빈 집으로 찾아와 승민을 기다리던 수지가 결국 기다림을 포기하고 빈 집을 잠시 바라보던 백샷에서, 수지의 훌쩍임이 (미리 보인 것이 아니라) 들리는 바로 그 순간에, 바로 그 동시에 내 뒷줄의 누군가가 훌쩍였었다. 멈춤 속에서 같이 멈추고, 훌쩍이는 순간에 같이 훌쩍이는 이 동시성이 무엇을 의미할까? 영화가 끝나고 밀물 빠지듯이 빠지던 사람들과, 나와, 또 영화가 끝나고 썰물 들어오듯이 가득찬 화장실의 소변대 앞에서, 그 줄에 나 역시 서서, 심지어 누군가는 방귀마저 시원하게 뀌던 그 순간, 갑자기 영화가 멈춘 곳에 멈춘 여자와 수지와 동시에 훌쩍이던 뒷줄의 누군가가 내 머릿속에서 번쩍였다.

두 번 사랑하지 않을 것의 집

철학자 바디우는 우리가 사랑의 영원성을 담보해내기 위해서는 "두 번 사랑하지 않을 것을 사랑하시오!"라고 말했다. 결국 한번 시작한 사랑에 끝이란 없다. 끝 이후에도 끝나지 않는 것. 반면 한번 사랑을 끝낸 이에게 끝없음은 없다. 끝 이후엔 또 다른 끝이 있을 뿐이다. 그것은 그저 주어진 대로 사는 것이다. "집이 그냥 집이지 지긋지긋한 게 어딨냐"는 엄태웅 어머니의 집이나, 사랑의 추억을 박제한 채로 집에다 가둬두는 한가인의 집, 새로운 집으로 단지 이주할 뿐이며 다만 무언가를 신축해내지는 않는 엄태웅의 삶의 정반대편 어딘가에 그 집이 있다. 우리의 집, 그 빈 집이.


by moonwhale | 2012/03/28 19:40 | 트랙백(2) | 덧글(5)
[하이킥: 짧은 다리의 역습] 계상-지원 커플을 응원하는 이들을 위하여...
에로스와 혁명, 사실 이보다 더 매끄러운 결합은 없다. 둘다 지배적인 코드를 박차고 나가 흐르는 흐름이자 유동성이기 때문이다. 사랑이 삶을 창조할 수 있다면, 그 창조활동 가운데 가장 아름답고 가치 있는 것은 바로 혁명에 대한 열망일 것이다. 혁명에 대한 열망이야말로 국가와 가족, 학벌, 계층의 벽에 갇혀 질식하기 직전인 에로스적 본능을 살아 숨쉬게 하는 최고의 전략이 아닐까.
(고미숙, 사랑과 연애의 달인, 호모 에로스 中에서)

위 글을 인용했음으로 알 수 있다시피, 난 그야말로 '전적으로' 지원과 계상의 관계를 지지한다. 나아가서, 하이킥이라는 이 특이한 시트콤이 시트콤이라는, 단지 웃음을 대목적으로 한채 모든 캐릭터들의 존재나 얽혀 있는 관계들을 단지 수단화(웃기기 위해)하거나 장치화하는 장르적 통속성에 복종하지 않는다는 차원에서, 오로지 이 둘만이 하이킥의 수많은 이성관계 중에서 가장 진정한 사랑을 구현하려는 관계라는 것을 감히 주장한다.

한편, 계상-지원의 관계에 대해서 많은 이들은 불쾌감을 표시한다. 이 불쾌감의 자기 근거는 대략 두세 가지 정도인데, 크게 보면 하나는 시트콤에 어울리지 않는 정극적 요소가 너무 부각된다는 것, 또 하나는 둘 간의 차이(나이 차이, 지위 차이, 가족 관계적(얽혀 있는 친족관계적 차이)차이 등)가 너무 크다는 것, 마지막으로 지원의 일방적 사랑에 불과하다는 것 등이 대략의 이유이다.

나는 이 세 가지 주장을 반박하며 동시에, 지원과 계상의 커플을 지지하는 많은 이들을 지지하려고 한다.

먼저 사람들은 지원과 계상의 관계를 지나치게 정극적인 관계로 판단하며(이 판단은 의심의 여지없이 맞다), 시트콤에 어울리지 않는 관계여서 지루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는 애당초 김병욱 피디의 세계관, 김병욱 피디의 시트콤 제작의 목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몰이해에서 비롯된 주장이 아닐까. 그는 엔딩에 대해서만 '정말로' 수개월 동안 백만개가 넘는 댓글이 달린 하이킥 2의 전설적인(?) 결말에서 사회 현실의 실재(낭만적으로 미화되고 모두가 행복해지는 그런 가짜 현실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를 단 한 장의 스냅사진("우리 이대로 멈췄으면 좋겠어요"라는 장면에서 정말 멈춘 후에 흑백처리되고 끝나는)으로 과감히 처리한 바 있다.

즉, 계급간의 차이는 어떤 사랑으로도 돌파할 수 없으며, 그 사랑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차라리 둘이 죽어야 '멈춰질(이루어질)' 수 있다고. 뿐만 아니라, 빵꾸똥꾸와 신세경의 동생은 막상 서로를 인격적으로 바라보고 존중해 줄 수 있는 성장을 하는 즉시 이민이라는 비극적 결과(한국에서 경제적으로 살아남을 수 없는 신세경 가족의 도피)를 통해 헤어질 수밖에 없음을 애잔하게 그린 바 있다. 결국 인간관계나 사랑등은 현실과 구조 내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는 인식을 과감히 밀고 나간 것이다.

결국 단언컨대, 김병욱 피디에게 있어서 시트콤이라는 장르는 목적이 아니라 수단에 불과하다. 범용하고 통속적인 시트콤들이 모든 현실과 인간관계들을 하나의 장치로 비인격화/수단화하고 웃음을 위한 인간관계로 전도시킬 때, 그는 이러한 상황을 다시 한번 전도시켜서 모든 웃음이든 시트콤이라는 장르든 그것들을 현실을 반영해내는 수단으로 원상복구시킨 것이다. 그는 왜 하필 이런 가장 현실적인 연출을 왜 하필이면 시트콤이라는 장르에서 시도했을까? 드라마에 대해선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시청자들의 태도, 그래서 역설적으로 비현실적인 해피 엔딩을 '진지하게' 바라는 상황을 돌파하기 위해서 정극의 '진지한 미화'를 피해 시트콤의 '우스꽝스럽지만 미화 없는 현실'을 그리기 위해서 불가피한 선택이지 않았을까? 그래서 웃음을 가장 큰 목적으로 바라보았던 시청자들의 기대감을 김병욱 피디가 배반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 기대감이 김병욱 피디의 작품세계를 결정지을 어떤 당위가 될 수는 없다.

둘째, 둘 간의 차이에 대한 불쾌감이다. 나이 차이나는 커플에 대한 이질감, 가족 관계(박하선과 윤지석이 만나는 상황에서)가 더 얽히는 것을 우려하는 혐오감등이 김지원-윤계상 커플에 대한 부정적 감각의 핵심 중 하나이다. 김지원-윤계상에 대해 부정적인 시청자들은 둘의 관계에 대해서 온화한 표현으로는 "이상해 보인다", "어울리지 않는다", 등의 애매하고 모호한 근거를 제시하고, 좀 더 적극적으로는 "원조교제스럽다", "징그럽다"등의 이야기를 하곤 한다. 결국 그들은 차이를 공격하고, 이 차이가 마치 근본적으로 속물적인 욕망(원조교제라든가, 어린 여자애를 특히 성적으로 좋아하는 변태 아저씨)을 가지고 있는 듯이 말하곤 한다. 물론 현실적으로 그런 식의 질 나쁜 관계들은 엄존하지만 적어도 하이킥 내에서의 김지원과 윤계상의 관계는 서로의 결핍을 담지하고 채워주는 순수한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사실 부정적인 시청자들이 정말로 우려하는 건 비슷한 나이대, 비슷한 환경, 비슷한 학벌, 비슷한 지위를 가진 이들간의 연애가 가져오는 안전성과 안정성을 깨트리는 모든 종류의 이질적인 관계들이다. 보수적인 사회로부터 지탄받을 위험을 가지거나, 안정된 행복과 쾌락을 보장할 수 있는 가능성이 눈에 보이게 보장되지 않는 불투명한 관계를 위협과 혐오로 느끼게 되는 것이다. 즉 가능한 사랑만을 안전하게 보장받고, 불가능해 보이는 사랑을 멀리하려는 심리이다. 한편, 우리가 진정한 사랑의 표본을 생각할 때, 그것이 실재했던 인물이든 아니든 몇몇의 대표적인 커플들을 나열하면 원수의 집안이면서 서로 죽음도 불사한 채 사랑했던 줄리엣과 로미오, 연인의 가문에 의해 거세를 당하고도 평생을 편지를 주고 받았던 아벨라르와 엘로이즈, 아버지와 법을 무시한 채 자신의 사랑을 지켰던 안티고네등이 떠오를 것이다. 이처럼, 진정한 사랑에 있어서 위험과 불가능성은 피해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역설적으로 반드시 빠지지 않는 필요조건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삶의 행복감만을 안전하게 공유하는 것이 연애나 파트너쉽이나 합병회사의 차원(안정적인 수익을 서로 주고 받을 수 있을 때만이 서로 엮여 있는)에 머무른다면, 진정한 사랑이란 언제나 법이나 벌이나 장애와 위험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선언하고, 지켜내고, 함께 죽는 것이 아니었나.

결국 시청자들은 안전한 관계, 이질적이지 않은 관계, 사회적으로 지탄받을 위험이 없는 관계에 대한 소망(달달하고 행복한 감각만을 누리려는)을 시트콤 내의 관계로 투사하면서, 역설적으로 진정한 사랑에 대한 열망을 포기하고 안정적으로 달콤한 사탕을 사랑대신 바라고 있는 것이 아닐까.

세계적인 철학자 알랭 바디우는 사랑이란 '진리의 구축'이라고 말했다. 그는 사랑은 하나로 융합되거나 한명이 다른 한명에게 너무나 희생적이거나 합법적 계약에 의한 교환관계같은 관계가 아니라고 한다. 사랑이란 둘이 함께 구축한 세계를 말한다. 둘은 사랑의 주체가 되어 단지 세계가 만들어놓은 룰에 복종하거나 달콤함만을 주고 받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부조리에 대항하며 동시에 둘의 관계를 통해 세계를 새롭게 구축하는 데 있다고 한다.

"최초의 장애물, 최초의 심각한 대립, 최초의 권태와 마주하여 사랑을 포기해버리는 것은 사랑에 대한 커다란 왜곡일 뿐입니다. 진정한 사랑이란 공간과 세계와 시간이 사랑에 부과하는 장애물들을 지속적으로, 간혹은 매몰차게 극복해나가는 그런 사랑일 것입니다." - 알랭 바디우, 사랑 예찬 中에서

마지막으로, 사람들은 둘의 관계가 지원의 일방적 사랑의 과도한 집착이라 불쾌할 뿐이라고 한다. 그러나, 같은 방식의 트라우마를 겪은 이들이 그런 경험을 통해 서로의 깊을 곳을 바라보고 바로 상대방의 그 '빈 깊은 곳'을 채우며 있어줄 때, 서로의 눈물을 바라봐 줄 때, 이 순간 속에 어떤 일방향적인 사랑만이 있을 뿐일까? 나는 오히려,  윤계상과 백진희의 관계야말로 일종의 숭배와 한없는 기다림과 그 기다리는 자기 자신에 대한 나르시시즘적인 슬픔을 겪는 관계에 가깝다고 본다. 또 윤종석의 김지원에 대한 사랑은 순수한 소년이 막 첫사랑을 시작할 때와 같이, 사랑하는 대상의 아픔을 채우려하기보다는 그의 곁에 그저 찾아가고, 기다리고, 곁에 있음을 공유하려는 수준에 머물러 있지 않을까. 반면에 서로의 결핍을 응시하고, 공유하고, 채우는 그런 관계. 서로를 치유하고 함께 상처를 마주하고 극복하는 관계. 이걸 가장 순수한 형태의 사랑이라고 말하지 않으면, 대관절 어떤 진정한 사랑이 있을까.

하이킥3는 인물들간의 로맨스에 과도하게 치중해서 유머와 현실을 동시에 잃어버린, 내 개인적인 평가로는 하이킥 시리즈를 통틀어 가장 흐린 작품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지원과 윤계상간의 관계는 소녀가 아직 제대로 사회에 진입하거나 재편되기 이전에 진정한 사랑을 시도하고 굴복하지 않는 순간을 그리는 가장 빛나는 관계 중의 하나라고 단언한다. 윤계상이 매듭을 짓기 위한 편지를 썼을 때 그 편지를 읽지도 않고 불태워버리며 자신의 마음에 다시 불씨를 지필 때, 혹은 비록 철없는 말이지만 헤어지지 않기 위해 자신의 현실적 위치와 이득(성적)을 포기하고 르완다로 같이 떠나자고 말할 때, 여기엔 이미 사회화되고 복종하고 안전한 연애만을 탐하는 이들이 절대로 가질 수 없는 어떤 진정한 윤리적 태도(사랑에 대한)가 언뜻 언뜻 빛나고 있지 않나. 문학이든, 드라마든, 시트콤이든, 그것들이 어떤 작품적인 의미를 지향한다면, 거기에는 반드시 주제가 무엇이든 영원에 대한 굴복하지 않는 태도가 있어야 한다고 본다. 오로지 그 길만이, 수억만년의 우주 속에서 덧없이 먼지로 사라져버릴 우리에게 결코 그 우주의 시간으로도 지울 수 없는 '영원의 한 순간'을 선사하지 않을까.

'나는 너를 사랑해'가 여러 측면에서 볼 때  '항상'을 의미한다면 '너를 언제고 사랑한다'고 통고하는 것은 사실상 우연을 영원에다 기록하고 고정시키는 것이라고 봐야 합니다. 말에 겁을 먹지 마십시오! 우연의 고정, 그것은 바로 영원의 통고입니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 보면 모든 사랑이 영원을 선언합니다. (중략) 예컨대, 행복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의 행복은 시간이 영원을 맞이할 수 있다는 그 증거인 것입니다." - 알랭 바디우, 사랑 예찬 中에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에게 말했다/ "당신이 필요해요"// 그래서/ 나는 정신을 차리고/ 길을 걷는다/ 빗방울까지도 두려워하면서/ 그것에 맞아 살해되어서는 안되겠기에 - 베르톨트 브레히트, 아침저녁으로 읽기 위하여

집착이라는 천박한 태도에 머물지 않고 그와의 관계 속에서 세계 전체를 바라보는 시좌를 바꾸는 것, 목숨을 무릅쓰고 그를 그 이상의 존재로 만들어주는 것. - 서동진

나는 왜 이웃을 사랑하는가? 그 이웃이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그를 사랑함으로써 비로소 '완전함'을 지향하게 되는 것이 기독교다. 그런 점에서, '사랑'은 어떤 완전한 실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완전함이 결핍되어있는 속에서만 탄생한다. - 지젝

난, 인간은 혁명과 사랑을 위해 태어난 것이라고 확신하고 싶다. - 다자이 오사무

by moonwhale | 2012/03/17 09:34 | 트랙백(1) | 덧글(4)
지붕킥 결말 해석 - 김병욱피디가 말하고자 한 것

저도 보고나서 왜 결말이 이런건지 잠시 경악을 금치 못했지만... 김병욱 피디의 성향이 극현실주의적 보수주의자인지라, 현실 속에서는 결국 행복을 이루기 힘들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 아닐까 싶네요. 황정음과 이지훈은 결국 헤어지고, 준혁이와 세경이 역시 이뤄지기 힘들고. 김병욱 피디의 세계관은 신세경의 마지막 말들(계급이동을 노력해봤자 결국은 누군가를 밟는 한국이란 현실에 대한 '죽음 선언') 역시 정확히 반영하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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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오히려 세경이가 지훈이가 서로의 사랑을 확인했을 때 시간을 '멈춤'으로써, 둘의 행복을 이뤄주는 아이러니를 연출한 것이 아닐까..생각합니다. 누구말대로 어쩌면 이게, 김병욱이 만들어낼수 있는 그 둘의 가장 해피엔딩이었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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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김병욱 피디의 세계관을 우리가 받으들일것인지 말것인지는 차치하고, 그는 아주 중요한 진실을 말했다고 생각해요. 뼈빠지게 일하는 신세경의 아버지가 결국은 한국에서의 삶을 포기하고 아이티로 가는 것, 겨우 겨우 자신의 편견을 극복하고 신애를 사랑할 줄 알게 된 해리가 신애와 헤어져야 하는 현실, 세경과 지훈이 계급간 격차를 무릅쓰고 사랑하는 순간대로 멈춰있기 위해서는 '죽음'을 선택해야할 지도 모른다는 그의 연출들은, 이 꾸질꾸질하고 더러운 한국의 현실이 기실 삶보다 죽음에 가깝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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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뱀발을 더 달자면, 삶의 해학이라 할 수 있는 '시트콤'에 있어서, 단연 국내 일인자라 할 수 있는 김병욱피디의 성향이, 사실은 시트콤과 정반대의 대척점에 서 있다는 거죠. 결국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비극을 통해 보는 시트콤적 희극이 아니라, 시트콤적 희극을 통해 보는 희극의 이면, 즉 다시 비극이라는 거지요. 그는 일상의 웃음을 통해 한국의 증상을 말하고자 했던 것이라 봅니다. 그리고 그 진단은, '말기암'에 가깝다는 거지요. 어설픈 결혼에 의한 해피엔딩부류의 모순을 은폐하는 드라마적 결말에 대해서 완전한 대척점에 서 있군요. 그것도 시트콤의 탈을 쓰고.

그러나, 시트콤의 대가가 이러한 시트콤적 희극, '멀리서 보기'를 멈추고 안티 시트콤적 비극, 즉 '가까이서 보기'로 재귀했다는 것만으로 그를 염세주의적 미학관을 가진 자로 치부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해요. 현실에서 이뤄질 수 없는 비극을 철저히 인식하는 이 현실주의자가 죽음으로 사랑을 이뤄주는 데서 만족하려는 염세적 소망을 가졌다고 해석하기 보단, "이대로는 절대로 행복할 수 없다."를 말그대로, 연출그대로 비린내나는  날것 그대로 우리에게 내놓았다고 생각합니다.

소박한 희망(열심히 살기, 돈벌기, 버티기 등)으로 인한 행복의 가능성을 꿈꾸는 모든 이들에게 사형선고를 내림으로, 소박한 희망만으로는 죽지 않을 수 없는, 그럼으로 죽지 않고도 사랑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을 찾아야만 한다는 인식을 얻게 되는 것이지요.
결국 '소박한 희망'이 오히려 비극을 이어가게 하는 아이러니라면, 이러한 구조를 완전히 전복해서 역으로 비극적 직시를 통해 '진정한 희망'을 만들어갈 수 있도록, 우리에게 '불편한 환기-역설적으로 희망을 열게 하는'를 이끌어내는 역할을 해줬다고 봅니다.
이런 불편한 환기를 위해 세경이가 죽은 것이라고 봐요. 비록 그녀의 사랑은 죽음으로 인해 '멈췄지만'(이어가지만) 죽은 세경이는, 우리에게 산 세경이가 되라고 불편하게 가르치지요.
그래서 우리는 살아서, 꼭 연애해야지요^^  그게 우리의 숙제겠지요. 아아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결말이에요.


by moonwhale | 2010/03/20 00:24 | 트랙백(2) | 덧글(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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